온체인 금융 패러다임 (The On-Chain Finance Paradigm)

기업 체인(Corp-Chain), 이제는 더이상 단순한 뉴스가 아니라고 본다.
Layer-1 관점에서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신호탄이지 않을까 싶다. 결제 인프라의 거인 스트라이프(Stripe)와 스테이블코인의 대명사 서클(Circle)이 자체 Layer-1(L1) 블록체인 구축을 선언한 것은, Web2의 최상위 포식자들이 Web3로 직접 진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크립토 업계가 지난 10년간 지켜온 ‘탈중앙화’라는 이념적 가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현실적 도전이 될것으로 보이고, 온체인 금융의 미래 권력 지도가 어떻게 그려질지에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표면적 이유를 넘어선 ‘L1 소유’의 진짜 욕망
기업들이 왜 Layer-2라는 쉬운 길을 두고 굳이 Layer-1이라는 험난한 길을 택할까?
뉴스기사에서 보면 표면적으로는 가치 포착, 통제권, 맞춤형 UX 등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더 근본적인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미래 디지털 경제의 ‘금융 원장(Financial Ledger)’ 그 자체가 되려는 야망이라고 본다. 결제라는 특수 영역에서 합의 메커니즘, 프라이버시, 거버넌스에 대한 ‘완벽한 통제권’이 약간의 편의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1) 가치 포착의 극대화:
단순히 거래 수수료를 아끼는 차원이 아니다. 이들은 테더의 Stables와 같이 스테이블코인을 가스비로 사용하는 ‘폐쇄 루프 경제(Closed-loop Economy)’를 구축하려 한다.
이를 통해 생태계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가치를 외부 유출 없이 흡수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MEV 자체를 통제하는 방식을 직접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악의적인 MEV를 원천 차단하여 사용자 경험을 향상시키거나, 혹은 그 가치를 프로토콜이 직접 포착해 수수료 절감 등 생태계 전체를 위한 인센티브로 재분배하는 등, 경제 모델 자체를 창조하는 ‘설계자’의 위치에 서게 됨.
2) 데이터 주권과 생태계 락인(Lock-in)
블록체인은 그 자체로 불변의 원장이다. Layer-1을 소유하고 운영한다는 것은 그 원장에 기록되는 모든 거래 데이터를 소유한다는 뜻이 된다. 이는 Web2 기업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데이터 독점’을 온체인 세계에서 실현하는 것과 같다.
스트라이프는 자사 Layer-1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거래 흐름을 분석하여 새로운 금융 상품을 개발하거나, 가맹점의 신용도를 평가하는 등 데이터 기반의 비즈니스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명백히 사용자와 가맹점을 자사 생태계에 영구히 묶어두는 가장 강력한 락인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3) 거버넌스로부터의 독립
‘주권 리스크’의 원천 봉쇄라고 볼 수 있는데, 글로벌 결제 기업에게 외부 요인에 의해 자사 비즈니스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만약 이더리움 Layer-2를 기반으로 삼았는데, 이더리움 커뮤니티의 거버넌스 결정(EIP)으로 인해 결제 최종성(Finality) 모델에 예측 불가능한 변화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주권 리스크(Sovereignty Risk)’가 된다. 자체 Layer-1은 이러한 외부 리스크로부터 완벽히 독립된, 오직 자사의 비즈니스 로직만을 따르는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과 같다.
스트라이프: 단순 결제를 넘어선 ‘온체인 커머스 제국’
스트라이프의 진정한 목표는 그저 결제 체인 구축이 아니다. 이들은 ‘온체인 정체성(Identity)’과 ‘상거래 그래프(Commerce Graph)’를 통합해 거대한 커머스 제국을 꿈꾸고 있다고 본다.
스트라이프가 준비 중인 Tempo 역시 업계의 큰 기대를 받는 Corpo Chain 프로젝트이다. 아직 세부 사양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단서들을 종합하면 그 전략적 지향점은 분명하다고 본다. Tempo는 단순히 개발자 친화적 체인을 넘어, Stripe의 핵심 사업인 결제·정산을 온체인화할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복잡한 수수료 정산, 실시간 매출 분배, 국경 간 결제 자동화 등이 스마트컨트랙트를 통해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근 인수한 프라이비(Privy)는 사용자의 지갑과 신원을 관리하는 기술을 제공한다. 이를 스트라이프의 Layer-1과 결합하면, 사용자는 단일 정체성으로 수백만 스트라이프 가맹점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구매 이력, 상호작용, 평판이 온체인에 기록되고, 이는 사용자의 동의 하에 다른 서비스와 연동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결제를 넘어, 사용자의 모든 상거래 활동이 프로그래밍 가능한 자산이 되는 Web3 커머스의 궁극적인 비전이다. 스트라이프는 이 제국의 인프라(L1), 신분증(Privy), 그리고 상점(가맹점 네트워크)을 모두 제공하려 하는 것이다. 애플이 하드웨어(아이폰), OS(iOS), 그리고 앱스토어를 수직 통합해 생태계를 장악한 전략과 동일하게 보인다.
서클: ‘온체인 달러’의 표준을 향한 승부수
반면, 최종 사용자를 직접 보유하지 못한 서클의 전략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클의 Layer-1은 방어적 조치인 동시에, USDC의 미래를 건 공격적인 쇼케이스이지 않을까?
스테이블코인 USDC 발행사 서클이 내놓은 Arc는 Corpo Chain이 지향하는 방향성을 가장 명확히 보여준다. Arc는 단순히 거래를 처리하는 체인이 아니라, USDC 중심의 폐쇄적이면서도 고도화된 금융 인프라로 설계되었다. Confidential Transfer, 내장형 외환(FX) 엔진 등 퍼블릭 체인의 탈중앙성을 포기한 대신, 스테이블코인 결제와 글로벌 외환 정산에 최적화된 금융 고속도로를 구축하려는 전략적 시도로 보여진다.
서클의 목표는 USDC를 미래 온체인 경제의 기축 통화, 즉 ‘온체인 달러’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사 Layer-1을 USDC가 가장 빠르고, 저렴하며,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모범적 환경’으로 구축할 것이다. 이후 이러한 레퍼런스를 통해 다른 개발자들이나 기업들이 “USDC를 제대로 쓰려면 서클 체인 위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려는 전략.
이는 마치 인텔이 자사 CPU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마더보드 칩셋을 직접 설계해 시장 표준을 주도했던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전략과 유사하다고 본다. 서클은 Layer-1 생태계의 최종 지배자가 되기보다, USDC를 공급하는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잡으려 하는 것같다.
온체인 금융의 미래
이러한 두 거인들의 참전은 크립토 생태계에 양날의 검이다. 수억 명의 신규 사용자를 온체인으로 유입시킬 폭발적인 기회인 동시에, 블록체인의 이념과는 상반된 Web2의 중앙화된 ‘Walled Garden’이 Web3에서 재현될 수 있다는 위협이기도 하다.
- 개발자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텐데, 허가 없이 자유롭지만 혼란스러운 퍼블릭 체인 위에서 혁신할 것인가? 아니면 안정적이고 막대한 사용자를 보장하지만 특정 기업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거대 생태계에 합류할 것인가? 이지 않을까.
- 투자자는 L1/L2 기술 자체의 우위보다, 그 뒤에 있는 기업이 ‘얼마나 많은 사용자를 온체인으로 데려올 수 있는가’라는 ‘유통의 힘’이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라고 볼 수 있다.
- 생태계 관점에서는 진정한 승자는 가장 탈중앙화된 체인이 아닐 수 있다. 블록체인의 모든 복잡성을 완벽하게 추상화하여, 사용자가 자신이 블록체인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쪽이 결국 시장을 지배할 것이다. 코인베이스 베이스앱이 이러한 역할에 앞장서고 있다고 본다.
결국 기업 주도 블록체인은 베이스 레이어(Layer-1)를 직접 통제하는 것이 타인의 레일 위에서 무언가를 구축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경제성, 제품 적합성, 그리고 가치 포착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베팅이라고 본다.
어떤 체인은 기존 사용자를 성공적으로 온체인 활동으로 전환시키며 번성할 것이고, 반대로 특정 체인들은 누구의 마음도 얻지 못한 채 고전할 것이라고 본다.
